3년간 칼럼을 쓰며 70여 개의 스케치와 공간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곳에 하나씩 차분히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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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이어도 좋고 휴식이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목적이어도 좋다. 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작은 설렘이 함께 한다.
강화의 초지대교를 건너기 전에 바다가 먼저 보인다. 짙은 갈색의 개펄을 품은 바다는 동해의 바다와는 또 다르게 찰랑거리며, 패인 개펄의 자국은 모든 사람의 모든 사연만큼 해변을 덮고 있다. 해든뮤지움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바다의 안내를 받는다.
강화도 길상산의 맨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미술관은 우리가 아는 여느 미술관과 사뭇 다르다. 카메라 한 컷에 담을 만한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다다르면 지하로 길게 뻗어있는 일직선의 경사로를 만난다. 경사로의 좌우벽면은 ‘지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이라는 듯 잠시 관람객의 일상을 산뜻하게 잘라낸다.
강화도 해든 뮤지엄
2024/10/12
자연의 품에 안긴 강화도 해든 뮤지엄 산책
대한민국 현대사의 80년대는 민주화 운동의 숨 가쁜 장면과 동일하다. 김근태(1947-2011) 선생 역시 투옥과 고문으로 혹독한 80년대를 보낸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다. 민주투사보다는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한 휴머니스트 김근태, 도봉산을 오르는 길목에 그를 기념하는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의 외관은 수직과 수평이 강조된 단순한 형태이다. 도봉산과 수락산의 풍경까지 끌어안고 있으니 선생의 올곧은 생애가 그대로 투영되는듯하다.
강인한 외관에 비해 건물의 내부는 햇살 가득한 사뭇 다른 풍경이다. 황규선 건축가의 작품이다. 건물 한가운데 중정을 중심으로 걷다 보면 민주를 갈망했던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고 있다. 전시, 공연 등을 위한 '공간 마루',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상상 곳', 민주주의와 인권 관련 전시를 위한 '기억 곳', 열람실의 '생각 곳' 등 여느 도서관과는 다른 공간들이 방문객을 안내한다.
김근태 기념 도서관은 도서관 본연의 기능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분들의 기록들을 구술, 채집하고 보관하는 기능뿐 아니라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아카이브(Archives)와 뮤지엄(Museum)이 함께하는 라키비움(Larciveum) 형태의 문화시설이다.
김근태 기념 도서관
2024/10/12
민주주의를 기록하다
삶과 시(詩)가 일치하는 단 한 명의 시인이 있다면 그는 윤동주(尹東柱·1917~1945)다. 27년을 살다가 일본의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조선의 청년 시인. 그의 독립운동은 부드러운 서정으로 쓰였으나 단호하고 깊은 울림이 있다. 1917년 태어나 1945년, 대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의 생애를 위해 문학관(종로구 누산동)이 세워졌다.
건축이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필연적으로 ‘파괴’를 통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 문학관은 세월의 흔적을 통해 그를 기리고 있다. 문학관이 자리 잡은 곳은 1979년에 용도 폐기된 청운수도가압장이다. 낡고 물때에 찌든 물탱크는 건축가의 손을 통해 다시 생명을 얻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물탱크는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이 투영된 우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축가 이소진의 작품이다.
문학관은 219㎡(30평 아파트 2개 규모) 면적에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시인의 시와 짧은 인생을 보여주는 제1전시실을 지나면 하늘이 열린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대로다. 노트가 아니라 공간에 쓰인 시집이다. 새롭게 디자인된 여백이 아니다. 어쩌면 오래도록 시인의 시집을 위해 이곳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들면 짧았던 그의 생애가 작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물탱크였던 제3전시실로 들어가 철문을 닫으면 어두운 빈 공간에서 시인의 모습이 영사되고 있다. 철문이 ‘쿵’ 닫히는 육중한 소리에 이미 마음은 일본의 형무소에 들어선 느낌이다. 내레이션 목소리가 들리는 건 어둠에 익숙해진 다음이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콘크리트 벽면을 통한 그의 울림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콘크리트 벽면에 손바닥을 댄 채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차가운 벽을 타고 시인의 맑고 깨끗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윤동주 문학관
2024/12/2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대로 전해지는 그의 공간
능선을 따라 숲길을 걷는다. 잔잔한 냇가를 건너면 소나무의 초록이 눈앞이다. 발끝까지 내려온 9월의 하늘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원주에 자리한 미술관 '뮤지엄 산'은 낮은 산 하나를 오르듯 우리를 에게 자연의 풍경 전체로 다가온다. 2005년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도시의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난 아름다운 산과 자연으로 둘러 싸인 아늑함’이라는 콘셉트로 디자인했다.
뮤지엄 산의 '산(SAN)은 'Space, Art, Nature'의 머리글자를 따서 작명했다.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된 미술관은 이름 그대로 공간과 예술과 자연, 이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미술관은 플라워 가든과 주전시장인 워터가든, 스톤가든을 지나 제임스터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웰컴센타를 지나면 플라워가든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진입로를 마주한다. 주변의 나무들이 런웨이를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잔잔한 연못 위에 떠있는 워터가든 미술관은 그 안에 무언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다.
미술관의 외벽은 노란빛이 도는 돌과 회색의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다. 외벽의 마감은 내부로도 이어져 외부의 자연을 끌어당기는 효과를 준다. 게다가 두 마감재가 만나는 사이 공간마저도 길고 가느다란 창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고 미술관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미술관의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삼각코트(Triangle Court)'라고 불리는 작은 중정에 들어서게 된다. 건축가에 의해 기획된 ‘무(無)의 공간이자, 사람(人)을 상징하며, ’ㅁ‘의 대지와 ’‘ㅇ’의 하늘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다. 다소 거칠게 깔린 돌바닥에 앉아 하늘을 마주하면, 사람들이 밟는 돌 소리마다 서로 다른 의미와 사연을 던져주는 듯하다.
자연을 담은 공간 뮤지엄 산
건축가가 만든 또 하나의 자연 'Museum SAN'
제주를 찾는 사람들의 여행은 기존의 유명 관광지나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새로 생긴 여행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머무르는 기간에 상관없이 짧게 느껴질 것이다. 그 짧은 기간에 '국립'이나 '도립'이 주는 다소 경직된 이름의 미술관을 방문한다? 선뜻 길을 재촉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출장 중에 겨우 남은 시간에 이곳 도립미술관을 찾은 이유가 내게는 있었다. 미술품보다 먼저 보이는 것, 바로 제주도를 보기 위해서다. 제주도립미술관은 부지 3만 8천 m 2(축구장 5-6개 정도)에 지하 2층, 지상 2층 7,087 m2(30평 아파트 60여 채 정도) 규모로 2009년 준공되었다. 간삼종합건축사사무소의 작품이다.
한라산의 중턱쯤에 자리한 미술관의 입구에 서면 야트막한 오르막길 위로 멀찍이 건물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제주의 여행이 시작된다. 제주 오름을 천천히 걷듯 건물로 걸어가는 길은 '제주의 들판' 그 자체다. 곧 만나게 될 미술관이 어떤 곳에 놓여 있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눈앞에 나타난 미술관은 콘크리트 물성을 그대로 드러낸 채 넓고 얕은 바다(반사연못)에 떠있다. 바다에 떠있는 섬, 제주도. 바로 그 풍경이 눈앞에 나타나있다. 미술관은 스스로를 치장하거나 현란한 매스로 뽐내지 않는다. 단순한 형태에 단순한 외벽은 처음부터 바다위에 떠있을걸 알았다는 듯 차분해 보인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면 또 다른 제주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중정(건물 내부에 있는 건물 사이의 마당)이다. 이 중정은 자연갤러리 또는 자연정원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한라산의 어느 한 곳을 그대로 가져온 듯하다. 미술관 내부를 조용히 걷다 보면 그곳 에는 산이 있고, 하늘이 있고, 바람이 있다. 도심에서 힐링하듯 마주한 한 뼘의 중정에 비하면 이곳의 자연갤러리는 그대로 한라산이다. 바람의 향을 맡을 수 있다.
2층 전시관으로 오르는 길의 계단 손스침은 내벽에 매립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사선으로 꺾인 손스침은 현무암(제주 돌)에 묻혀 한라산으로 오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렇게 2층을 돌아 내려가는 길에서 한 번 더 놀라운 풍경과 마주한다. 일직선으로 연결된 신비한 느낌이 들게 하는 쭉 뻗은 계단과 높은 투명한 유리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 계단을 내려갈 때의 기분은 한라산을 하산할 때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올려다본 천장의 하늘은 그대로 이곳이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주를 닮은 제주도립 미술관
바다위 떠있는 미술관 JMOA(Jeju Museum Of A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