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은 건축주

인천 개항장

날짜
2025/06/14
활동
인천개항장
댄비건축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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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교 6번째 가는곳은 [인천 개항장 문화지구]입니다 서울 정동과는 또다른 근대건축의 보물같은 곳입니다. 1928년 염상섭의 소설 [이심]에는 '자동차는 사람이 장날같이 복작대는 해안을 한바퀴 돌아 만국공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음악회 구경하느라 몰려드는...' 금호아트홀의 첼로음악회 풍경 같네요 그시절의 거리로 가봅니다 점심은 물론 차이나타운의 자장면입니다 토요일(14일) 오전 10시 [인천 중구청] 앞마당에서 만납니다
[자연스 후기]
처음에는 군산에서 만났던 장면들이 이 곳에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은행 건물에 들어서서 불공평했던 환율을 보면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시청사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에서 본 감자기근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기 돌아다니다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인천 개항장 문학관에 들어갔습니다
한국 근대문학과 작가들에 관한 자료를 한데 모아 둔 곳이었습니다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작가 몇몇을 알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근대작가가 이리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라 예민한 감수성과 뜨거운 감정을 지닌 젊은이로 다가왔습니다
글쓰기를 했던 사람들 가난했지만 정신이 살아있던 사람들
멋지다 나의 정신은 살아있는가, 지금?
커다란 중국 땅에서 쫓기듯 나와 이 곳에 발붙일 수 밖에 없었던 중국인들 그들의 기구한 삶도 값싸지만 너무 맛있는 탕수육에 배어 있었다 나의 삶은 향기로운가?
오래 남아있는 것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 그 너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찾게 되는 것 같다
오늘의 건축학교 기억도 내 기억 속에 오래 스며들 것이다.
[우영이형 ]
때로 '걷는다'는 말은 아껴둔 책 한권을 읽는다는 말과 많이 닮아 있다. 인천 개항장거리를 걷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꼭 씹는 인문학도 아니고 가슴 떨어지는 시집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가벼운 수필집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참 기분 좋은 거리였다. 물론 낭만보다는 울음이 더 많았던 거리였을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눈뜨는 아침이 견디지 못할 그런 시절이었으리라. 그 소란스러움을 상상했다. 거리는 대만 사람들로 시끄럽고 반대편 테라스에는 분명 프랑스 어디쯤에서 온 누군가가 앉아 있었을 것이다. 노란색 정장의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조선의 변화를 알고 있다는듯 웃고 있었다. 그렇게 거리는 들뜨고 소란스러웠겠다.
공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상상 때문이다. 폭이 3미터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5미터의 높이 때문인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또 걷는 그 모든 공간은 오직 그의 상상만으로 만들어진다. 혹시 오늘 오후 햇살 좋은 까페에 있었다면, 그 경험이 행복했다면 그럴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그 바닥의 타일과 벽의 질감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마주한 사람의 배경이 되는 창문이 그랬을 것이고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의 동선을 따라가는 탁자 사이가 그랬을 것이다. 건축을 하면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공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과의 상상 때문이다.
인천 개항장 거리를 걸으면서 정말 뜬금없이 스무살 시절 청춘의 우상이었던 전혜린의 책 첫페이지를 생각했다. (물론 정확하진 않겠지만) "유럽을 다시 방문한다면 그건 안개와 가로등 때문 이었을 것이다. 나를 처음 반겨준 것은 뮌헨의 안개였다." 가보지도 못한 뮌헨의 거리를 생각했다. 골목골목 마치 한편의 소설을 읽듯 걸었다.
130년전에도 그 팥죽집에는 여전히 갈색 목재 프레임이 인상적이었을테고 유럽 여행을 마치고 전날 밤 돌아온 소녀를 필두로 그날처럼 5명 소녀들의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가 가득했을 것이다.
모두들 각자 숨겨둔 소설 한권을 떠올렸다면 그날 개항장 거리의 산책은 성공적이었으리라.
[아녜스의 후기]
인천 개항장. 집에서 너무 먼건 아닌가, 뭔가 특별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역사 공부를 AI랑 하면 어떨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영이형의 선택은 항상 옳았으니 이번에도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게다가 유럽 신문물을 접하고 이제 막 한국에 돌아온 친구들도 나온다니 가지 않을 수 없었지. 지니와 나는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재잘재잘 2시간을 갔다.
그런데 웬걸. 인천 개항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설레임 시작이라니. 급작스러운 모드 전환에 나 스스로 좀 당황스러웠다. 마치 드라마 세트장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그동안 내가 겪고 보아온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속에서나 접했을 법한 이야기가 왠지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그렇다. 지난 종묘에 이어 인천 개항장도 내게는 첫 만남이었다.
드라마 세트장 같은 느낌은 두가지 때문이었다. 1900년대 초를 연상시키는 거리의 구획과 건물들, 원래 있던 것과 새로 들어온 것이 만나 조선만의 새로운 모습으로 문화로 삶으로 다시 만들어지던 흔적들, 그러나 1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본래의 건물들은 거의 사라지고 이 전체를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간신히 재현하고 노력한 흔적들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세세하고 애정 가득한 우영이형의 시선을 따라 걷고 듣고 바라보며 그 시간 속으로 젖어 들어갔다.
조선에 새로운 종족(?)의 사람들이 가져온 새로운 생활양식과 문물들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금융이었다. 돈이 상품이 되고 불투명한 환율 시스템이 돌아가는 동안 지금 어떤 과정을 통해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 흔적은 예전 은행의 금고였다는 방들 안에 정말 큰 글씨로 가득히 기록되어 있더라. 수탈, 약탈 이런 언어들로만 가득하게. 100년 전의 ‘모던함’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나라면 어떻게 기록했을까. 어떻게 살아내고 무엇을 꿈꿨을까. 창고를 고쳐서 만들었다는 한국근대문학관은 따뜻했다. 우리는 한참을 머물렀다.
이 모든 기록과 기록없음이, 그 모든 삶의 흔적과 그 흔적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연결된 경험이 있었던 날이다. 그 연결된 경험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의 연결이기도 하지만 그 공간을 함께 바라보고 걸으며 함께 느끼고 웃을 수 있었던 사람들과의 연결이기도 하다. 차이나타운이 처음 형성되었던 곳이니 오래된 중국집에서 모두 짜장면과 흰짬뽕, 탕수육을 먹고 100년 된 목조건물의 카페에서 팥빙수도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보너스 찬스! 우리를 어디다 내려주면 모두 무사히 집으로 흩어질 것인가를 고민하던 우영이형이 예정에 없던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부천 아트벙커 39. 지금은 전시장이자 카페가 된 이 공간은 예전 쓰레기 소각장을 개조한 재생건축물이다. 여전히 어떻게 쓰레기를 처리했는지 공간마다 그대로였다. 다소 섬뜻할만큼. 쓸어없애고 싶을 흉칙한 공간이었을 수 있는데 그것을 기록해두는 사람들과 경험하는 사람들을 통해 공간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있다.
또박또박 기록해두지 않았는데 자연스와 우영이형의 리뷰를 읽으니 맞다, 나도 그래서 좋았구나, 그래서 설레였구나, 가슴 어딘가가 울렸구나 알게 되었지. 건축학교에 가면 대체로 나는 즐거운 흥분상태여서 이번에도 전혜린의 가스등이나 뭰헨의 거리 이런건 떠올리지도 못했다. 고등학교 때 그녀의 책을 읽으며 아, 나도 서른에 삶이 끝나는건가, 그 후에도 삶이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이 리뷰를 쓰는 시간이 좋다. 다음에는 저녁 즈음 가서 그 길을 걸어보아야겠다. 갈 곳이 많아진다. 첫눈 올 때 종묘도 다시 가야 하고.